자유를 섬기는 교회 (눅 4:16~30)

2026.08.16이재훈누가복음 4:16~30

자유는 빼앗기기 전에 먼저 버림받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자유로부터 도피하지만, 십자가로 참된 자유를 얻은 교회는 하나님만 예배하고 이웃의 자유를 섬기며 자유를 지킵니다.

자유는 얻기보다 지키기가 더 어렵습니다

81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광복을 체험이 아니라 교과서의 이야기로 물려받았습니다. 한자 문화권에는 원래 자유에 해당하는 명사가 없었고, 조선시대에 자유는 제멋대로 구는 방종을 뜻했습니다. 자유의 개념은 복음이 전해지고 기독교 세계관이 퍼지면서 비로소 이해되기 시작했습니다. 그 짧은 역사의 자유가 요즘 세대에게는 와이파이처럼 끊어지기 전에는 있는 줄도 모르는 것이 되었습니다. 새장에 오래 갇힌 새가 문이 열려도 날지 못하듯, 자유는 얻기도 어렵지만 지키기는 더 어렵습니다.

사람들은 자유를 빼앗긴 것이 아니라 도망쳤습니다

1900년 독일에서 태어난 유대인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은 루터와 괴테와 칸트를 낳은 나라의 국민이 투표와 환호로 자유를 독재자에게 넘기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1941년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사람들이 자유를 뺏긴 것이 아니라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지는 불안 때문에 도망친 것이라고 답했습니다. 도피의 길은 강한 지도자에게 기대는 복종, 미워하고 파괴하는 파괴, 다수 속에 숨는 동조입니다. 독일 국민은 이 세 길을 모두 걸었습니다. 그래서 자유는 빼앗기기 전에 먼저 버림받고, 전체주의는 탱크보다 마음으로 먼저 들어옵니다.

도피의 뿌리는 하나님을 떠난 데 있습니다

인간은 본래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 안에서 살도록 지음받았습니다. 스스로 있는 자유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답하신 하나님께만 있고, 인간의 자유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유입니다. C.S. 루이스의 말처럼 하나님을 등질 수 있는 데까지 이르러야 진정한 자유이기에, 하나님은 사랑 때문에 배반할 자유까지 주셨습니다. 그 관계를 끊은 아담과 하와에게 남은 것은 숨음과 두려움과 책임 전가였고, 뿌리 뽑힌 인간은 독재자와 이념과 돈 같은 우상에 기댑니다. 그래서 자유로부터의 도피는 예배의 문제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도 광야에서 애굽의 고기 가마를 그리워했으니, 자유는 선포가 아니라 광야의 훈련으로 체득됩니다.

국가는 정의 아래에, 정의는 사랑 안에 있어야 합니다

링컨의 노예 해방 직후 미국 남부의 닭이 크게 줄었다고 합니다. 해방된 노예들이 새벽마다 자신들을 깨우던 닭부터 잡아먹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제의 사슬을 부수는 일과 내일의 삶을 세우는 일은 다릅니다. 스위스 신학자 에밀 브룬너는 1943년 『정의와 사회의 질서』에서 어떤 국가도 구원자가 될 수 없고, 구원자가 되려는 순간 우상이 된다고 했습니다. 정의는 자유가 사는 집이고, 자유는 국가가 베푸는 선물이 아니라 창조주께서 각 사람에게 주신 몫입니다. 자유를 지키는 것은 정의이고 정의를 완성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자유 그 자체가 되어 오셨습니다 (16-21절)

나사렛 회당에서 예수님은 이사야 61장을 읽으시면서 58장 6절의 "억눌린 사람들에게 해방"을 더하셨고, "보복의 날"은 읽지 않으셨습니다. 해방받고도 자유를 나누지 못한 실패를 십자가로 이루시겠다는 뜻이며, 지금은 원수 갚는 때가 아니라 은혜의 해라는 강조로 해석됩니다. 누가복음 4장 18절의 '자유'인 아페시스는 '죄 사함'으로도 번역되며, 묶인 것을 끊어 던져버린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자유를 가르치는 선생이 아니라 자유 그 자체로 오셨고, 참된 자유는 십자가로 하나님께 돌아가 다시 의지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갈라디아서 5장은 이 자유를 육체의 기회로 삼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 종이 되어, 이웃의 자유를 함께 지키고 섬기라고 합니다.

미움의 포로가 되지 않는 자유인 (22-30절)

예수님이 사렙다 과부와 시리아 사람 나아만의 이야기를 전하시자 나사렛 사람들은 분노하여 예수님을 낭떠러지로 몰고 갔습니다. 원수 나라의 군대 장관이 고침받았다는 말은 일본 군대 장관이 고침받았다는 말처럼 들렸고, 그 분노는 자유인의 마음이 아니라 민족 감정이었습니다. 우리는 일제의 침략과 폭력을 분명히 기억하고 진실과 사과를 요구해야 하지만, 미움의 포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2007년 도쿄 러브소나타에서 하용조 목사님은 "피해자의 오만을 회개합니다"라고 말해 일본인들에게 더 큰 울림을 주었습니다. 일본은 가해국이자 우리가 복음을 전해야 할 가장 가까운 선교지입니다.

자유를 섬기는 교회가 해야 할 세 가지

광복의 기억은 밖으로 어떤 나라의 제국주의도 용납하지 않고, 안으로 어떤 권력도 정의 위에 서지 못하게 깨어 있는 것입니다. 첫째, 교회는 자유의 근원이신 하나님만 예배하며 어떤 권력과 이념도 하나님의 자리에 서지 못하게 합니다. 둘째, 법과 제도는 자유의 그릇일 뿐이므로 교회는 지도자를 우상 삼지 않고 미움에서 힘을 얻지 않으며 다수 속에 숨지 않고 옳고 그름을 스스로 분별하는, 자유의 무게를 감당할 사람을 키웁니다. 셋째, 가난한 자와 포로된 자, 이주민과 탈북민, 북녘 동포 같은 억눌린 이웃을 자유케 하는 일을 섬깁니다. 남과 북이 81년 만에 이토록 달라진 이유는 자유가 있었는가 없었는가 하나입니다.

삶에 적용하기

  • 광복의 은혜를 당연하게 여기지 말고 자유의 무게를 기꺼이 짊어집시다.
  • 지도자에게 복종하거나 미움과 파괴에 힘을 얻거나 다수에 동조하지 말고 옳고 그름을 스스로 분별합시다.
  • 하나님만 예배하며 어떤 권력과 이념도 우상의 자리에 올리지 맙시다.
  • 일제의 역사를 기억하되 미움의 포로가 되지 말고 일본을 복음을 전할 선교지로 품읍시다.
  • 사랑으로 서로 종이 되어 이주민과 탈북민, 북녘 동포 같은 억눌린 이웃의 자유를 섬깁시다.

요약은 설교 자막을 바탕으로 자동으로 만든 것이라 실제 설교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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