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와 말씀
자유를 섬기는 교회 (눅 4:16~30)
자유는 빼앗기기 전에 먼저 버림받습니다. 참된 자유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께 돌아가는 데서 시작되며, 교회는 그 자유를 섬기고 이웃을 자유케 해야 합니다.
자유는 얻기보다 지키기가 더 어렵습니다
1945년 8월 15일 우리 민족은 35년의 식민통치에서 벗어났지만, 81년이 지난 오늘 광복은 체험이 아니라 역사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조선시대에 자유는 방종과 같은 뜻이었고, 이 말이 제 뜻으로 자리 잡은 것은 성경이 보급되고 교회가 세워진 뒤였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자유다운 자유를 누린 것은 몇십 년에 불과합니다. 새장에 오래 갇힌 새는 문을 열어도 날지 못하듯, 자유는 총칼에만 빼앗긴 것이 아니라 국민이 제 손으로 내어준 일도 되풀이되었습니다. 그래서 자유는 한 세대가 그 무게를 기꺼이 짊어질 때만 다음 세대로 전해집니다.
사람들은 자유로부터 스스로 도망합니다
독일계 유대인 사회심리학자 에릭 프롬은 신학과 교양의 나라 독일이 투표와 환호로 자유를 독재자에게 넘기는 것을 보았고, 1941년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썼습니다. 사람들은 자유를 빼앗긴 것이 아니라,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져야 하는 불안 때문에 도망했다는 것입니다. 그가 본 도피의 길은 강한 지도자에게 기대는 복종, 미워하고 부수는 파괴, 다수 속에 숨는 동조 세 가지입니다. 독재자에게 열광하고 한 민족을 증오하며 다수의 의견이라고 밀어붙이는 사회는 자유에서 도피하는 사회입니다. 전체주의는 탱크로 오기 전에 마음으로 먼저 들어오며, 자유를 지키는 전선은 국경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입니다.
자유로부터의 도피는 예배의 문제입니다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만 자유하도록 지음받았습니다.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하신 분은 홀로 자유하신 하나님뿐이며, 인간의 자유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유입니다. 하나님이 배반할 자유까지 주신 것은 사랑 때문이며, 우리를 로봇 같은 존재가 되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처럼 되려다 불안과 소외를 얻었고, 기댈 곳을 찾아 독재자, 이념, 돈과 성공 같은 우상에게 갔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도 광야에서 애굽의 고기를 그리워하며 확실한 종살이를 택했습니다. 링컨의 노예 해방 뒤 해방된 노예들이 닭부터 잡아먹었다는 이야기처럼, 사슬을 부수는 일이 내일의 삶을 세우는 일을 대신하지는 못하므로 자유에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국가는 정의 아래 서야 하고 정의는 사랑이 완성합니다
스위스 신학자 에밀 브룬너는 『정의와 사회 질서』에서 자유를 삼키는 국가를 진단했습니다. 국가는 인간을 구원하는 기관이 아니며, 국가를 구원자로 믿는 순간 국가는 우상이 되고 국민은 그 종이 됩니다. 국가의 몫은 한 사람의 자유가 다른 사람의 자유를 해치지 않게 하는 것이고, 정의는 자유가 사는 집과 같습니다. 자유는 국가가 주는 선물이 아니라 창조주께서 각 사람에게 주신 몫입니다. 국가가 스스로 정의의 근원이 되면 옳고 그름의 기준을 독점하고 생각과 양심, 예배까지 요구하게 되며, 브룬너는 이를 불의의 극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정의는 사회의 뼈대일 뿐이고 그것을 완성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자유를 가르치신 분이 아니라 자유 그 자체이십니다 (18-21절)
예수님은 나사렛 회당에서 이사야 61장을 읽으셨습니다. 이사야 58장 6절을 덧붙이셔서, 해방받고도 눌린 자를 풀어주지 못한 백성의 실패를 당신이 이루시겠다고 하셨고, 보복의 날 앞에서 멈추셔서 지금은 은혜의 해임을 강조하셨습니다. 누가복음 4장 18절의 '자유'는 24장 47절의 '죄 용서'와 같은 헬라어 아페시스입니다. 자유로부터의 도피가 하나님으로부터의 도피에 뿌리를 두므로, 참된 자유도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께 돌아가는 데서 시작됩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이 만났고, 다시 접붙여진 사람은 불안과 우상이 필요 없어져 다수가 아닌 진리를 따르고 미움을 용서합니다. 갈라디아서 5장은 이 자유를 육체의 기회로 삼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 종이 되는 데 쓰라고 합니다.
자유가 흘러가는 곳은 원수에게까지 닿는 은혜입니다 (22-30절)
예수님이 사르밧 과부와 시리아 군대 장관 나아만의 이야기를 꺼내시자 고향 사람들은 분노하여 예수님을 벼랑으로 몰았습니다. 둘 다 이방인이었고 나아만은 침략국의 장관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피해자의 마음속 분노를 아시고도 구약의 이야기로 그것을 드러내셨습니다. 광복절에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을 기억하고 진실과 사과를 요구하는 것은 정당하지만, 그리스도인은 미움의 포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2007년 도쿄 러브소나타에서 하용조 목사님은 피해자의 오만을 회개한다고 고백했고, 많은 일본인이 그 메시지로 복음과 한국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분노에서만 멈추는 광복의 기억은 절반의 기억이며, 그 분노는 우리가 아직 자유에서 도피하고 있다는 표시입니다.
자유를 섬기는 교회가 해야 할 세 가지
첫째, 자유를 섬기는 교회는 자유의 근원이신 하나님만을 예배하며 어떤 권력과 이념도 하나님의 자리에 오르지 못하게 합니다. 예배하는 백성이 많을수록 국가는 우상이 아니라 정직한 기관일 뿐임을 세상에 전하며, 그래서 독재자들은 교회를 길들이려 했습니다. 둘째, 복종과 파괴와 동조의 길에 들어서지 않고 진리만 따를 사람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키웁니다. 셋째, 억눌린 자, 탈북민, 이주민 같은 고통받는 이웃을 자유케 하는 일을 섬깁니다. 남과 북이 80년 만에 이렇게 달라진 이유는 자유가 있었는가 없었는가 하나뿐입니다. 광복의 은혜를 기억하되 거기에 머물지 말고, 그리스도 안에서 깨어 예배하며 누군가를 자유케 하는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삶에 적용하기
- 자유가 당연한 것이 아님을 기억하고 그 무게를 기꺼이 짊어질 신앙의 힘을 기릅시다.
- 복종, 파괴, 동조의 길에 들어서지 않도록 어떤 지도자나 이념도 우상 삼지 말고 하나님만 예배합시다.
- 역사를 바르게 기억하되 미움과 분노의 포로가 되지 않도록 마음을 지키고 용서합시다.
- 십자가로 죄 사함을 받은 자유인으로서 그 자유를 육체의 기회로 삼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 섬깁시다.
- 탈북민과 이주민 같은 억눌린 이웃을 자유케 하는 일에 힘씁시다.
요약은 설교 자막을 바탕으로 자동으로 만든 것이라 실제 설교와 다를 수 있습니다.
예배 전체를 받아쓴 원문입니다. 문장을 누르면 그 장면부터 재생합니다. 자동으로 받아쓴 원문이라 틀린 글자가 있을 수 있습니다.
원문을 불러오는 중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