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와 말씀
무엇을 사랑하십니까? (요일 2:15~17)
사람은 무엇을 사랑하느냐에 따라 인생이 결정됩니다.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와 욕구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욕구가 하나님을 향하도록 제자리를 찾게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대상이 인생의 방향을 정합니다
사람은 무엇을 사랑하는가에 따라 인생이 결정됩니다. 우리는 사랑에 의해 창조되었고 사랑을 위해 창조되었으며, 인간의 모든 갈망은 근본적으로 사랑에 대한 갈망입니다. 본문의 사랑은 아가파오로, 무조건적인 사랑을 넘어 모든 정서를 다해 최우선으로 몰입하는 애착을 뜻합니다. 청교도 존 오웬은 사람의 정서를 영혼이라는 배의 조타기에 비유하며 정서의 방향대로 영혼이 움직인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지식적인 동의만이 아니라 온 마음과 모든 정서로 그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배역하는 성향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15절)
요한일서 2장 15절은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합니다. 역사 속에는 세상을 물질세계로 보고 수도원이나 종교적 금욕으로 도피한 흐름이 있었지만, 그것은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은 하나님을 떠나 그를 배역하는 인간 마음의 성향이며, 하나님은 이 피조 세계를 포기하지 않고 사랑하셨습니다. 어거스틴의 말처럼 사랑해야 할 것을 사랑하고 사랑해서는 안 될 것을 사랑하지 않는 것, 곧 우리 안의 하나님을 배역하는 성향을 거절하고 모든 욕구를 제자리로 돌리는 것이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욕구 자체는 악하지 않으며 방향과 균형이 문제입니다
창세기 1장부터 3장에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음식, 성, 권력, 아름다움, 일, 교제, 하나님과의 교제, 지혜에 대한 욕구를 주셨다고 나옵니다. 이 욕구들은 중립적이며 하나님이 창조하신 선한 것입니다. 불교처럼 욕구 자체를 제거하려는 수행도 결국 또 다른 욕구의 형태입니다. 문제는 욕구가 하나님 앞에서 왜곡되어 어떤 것은 지나치고 어떤 것은 약화되어 불균형에 빠진 데 있습니다. 거식증과 과식증, 성 중독, 가정을 다스리지 않는 무관심이 모두 그 예입니다.
세 가지 욕구는 거룩하게 변화되어야 합니다 (16절)
요한일서 2장 16절은 망가진 욕구를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세 가지로 요약합니다. 육신의 정욕은 음식과 성에 대한 욕구이고, 안목의 정욕은 아름다움을 보며 만족하려는 욕구이며, 이생의 자랑은 권력, 일, 지혜, 교제에 대한 욕구입니다. 이 가운데 지배하려는 욕구와 교만, 자기 영광을 구하는 욕구는 영적인 영역으로 갈수록 더 교묘하고 영향력이 커서 더 무섭습니다. 그러므로 육신의 정욕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섬김의 욕구로, 안목의 정욕은 절제의 미덕으로, 이생의 자랑은 다른 영혼을 섬기는 사랑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아버지의 사랑이 마음을 주장할 때 욕구가 제자리를 찾습니다 (17절)
요한일서 2장 17절은 세상과 세상의 정욕은 사라지지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은 영원히 산다고 말합니다. 어거스틴이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하고 싶은 대로 하십시오라고 했듯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중심이 잡혀 있어 욕구가 질서 있게 움직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권력욕은 섬김으로, 일에 대한 욕구는 안식으로 바뀝니다. 시편 63편과 42편의 고백처럼 하나님의 임재를 목마르게 갈망할 때 다른 욕구들도 제자리를 찾으며, 그 사랑은 십자가로 우리를 사랑하신 아버지의 사랑에서 시작됩니다.
삶에 적용하기
- 지금 내 마음의 정서가 하나님과 세상 가운데 어느 쪽으로 기울어 있는지 돌아봅시다.
- 무엇을 할지 판단하기 전에 내가 지금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지 먼저 점검합시다.
- 욕구를 없애려 애쓰기보다 그 욕구의 방향과 목적을 하나님께 맞추어 드립시다.
-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목마르게 구하며 그 사랑이 내 마음을 주장하도록 날마다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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