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육신[2] 자신을 비우신 하나님의 겸손 (빌 2:5~11)

2025.12.07이재훈빌립보서 2:5~11

성육신의 놀라움은 하나님이 육신을 입으신 데 있지 않고,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 자신을 비우신 겸손한 마음에 있습니다. 아담의 길이 아닌 그리스도의 길을 걷는 것이 우리의 인생길이어야 합니다.

문제의 해답은 성육신의 마음에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여러 교회에 편지를 쓸 때마다 예수님의 성육신을 설명하고, 교회의 문제를 풀 해답도 성육신에서 찾습니다. 우리가 인생의 문제 앞에서 당장의 방법이나 사람을 찾을 때, 하나님은 우리 마음을 다시 살피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이신 성육신의 마음을 돌아보게 하십니다. 빌립보 교회는 하나님께 헌신된 귀한 교회였지만 다툼과 분열을 겪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2장 중반부에서 성육신을 말하는 것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다툼과 분열은 마음의 문제이며, 그 마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에서 멀어졌기 때문이라는 지적입니다.

놀라워할 것은 낮아지신 그 마음입니다 (5-8절)

영이신 하나님이 육신을 입으셨다는 사실은 무에서 유를 만드신 창조의 능력에 비하면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놀라워해야 할 것은 하나님과 동등되신 분이 영광을 내려놓고 권리를 포기하시며, 연약한 존재와 죄인으로 취급받고 대신 죽으시는 데까지 낮아지신 마음입니다. 사람들은 누가 자신을 인정하지 않거나 무시하고 모독하면 화를 내고 대적합니다. 사람 사이에서는 자신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기가 불가능해 보입니다. 그러나 모든 영광을 가지신 분이 자신을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여기셨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충격으로 다가와야 합니다.

본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리를 비우셨습니다 (6절)

본문이 그냥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체'라고 쓴 것은, 자신을 비우셨다는 말이 하나님 됨의 중단이나 본성의 포기로 오해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19세기 루터파 가운데는 사람이 되실 때 하나님의 본성이 중단되었거나 사라졌다고 믿은 이들이 있었으나, 하나님의 본성은 사라지거나 버려질 수 없습니다. 비우신 것은 '하나님과 동등됨을 기득권으로 여기지 아니하셨다'는 말씀대로 하나님으로서의 모든 권리입니다. 이 단어의 헬라어 본뜻은 '탈취하다'이며, 우리말이 어색하게 느껴지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아담의 길과 그리스도의 길

바울이 '탈취'라는 단어를 쓴 것은 성육신을 창세기 3장 인간의 타락과 대조하기 위해서입니다. 타락의 본질은 금지된 열매를 먹으면 하나님처럼 되리라는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과 동등됨을 탈취하려 한 것입니다. 인간은 아담 안에서 스스로 높아지려다 추락했지만,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은 자신을 비우고 권리를 내려놓으셨고 하나님이 그분을 지극히 높이셔서 우리의 주님이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인생길도 끊임없이 높아지려다 추락하는 길과, 낮은 곳을 추구하며 하나님이 세워 주시는 길로 나뉩니다.

종의 형체, 사람의 모양, 십자가의 죽음 (7-8절)

예수님이 자신을 비우시고 취하신 것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종의 형체는 겉모습이 아니라 자신을 보신 태도로, 권리만 가진 하나님이 권리 없이 의무만 가진 종으로 자신을 여기신 것입니다. 둘째, '사람의 모양이 되셨다'의 '되다'는 단순과거로 취소되지 않고 영원히 지속되는 사건을 뜻합니다. 초대교회의 가현설은 성육신이 잠시였기를 바랐지만, 예수님은 그 몸으로 죽고 부활하고 승천하셨으며 다시 오십니다. 셋째, 하나님께는 해당되지 않는 십자가의 죽음을 취하셨습니다. 불순종하면 반드시 죽는다는 말씀 때문에 인간이 죽고 세상이 멸망 가운데 놓였기 때문입니다.

삶에 적용하기

  • 문제 앞에서 당장의 방법을 찾기보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마음을 먼저 돌아봅시다.
  • 다툼과 분열의 뿌리가 마음에 있음을 인정하고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하나 됩시다.
  • 스스로 높아지려는 아담의 길을 버리고 낮은 곳을 추구하는 그리스도의 길을 걸읍시다.
  • 자신을 비우시고 종이 되신 예수님의 겸손한 마음에 놀라워하며 묵상합시다.

요약은 설교 자막을 바탕으로 자동으로 만든 것이라 실제 설교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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