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와 말씀
[예배영상] 거룩한 충격, 각성을 일으키다 (행 5:1~11)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때로 충격적인 사건으로 깨우셔서 거룩하게 하십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은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사건입니다.
사랑하시기에 각성시키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우리를 무조건 사랑하시지만 무분별하게 사랑하시지는 않습니다. 있는 그대로 사랑하시지만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두지는 않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계속 임하고 우리가 거룩하고 의로운 모습을 갖도록 때로 징계하시고 충격적인 사건으로 각성시키십니다. 사도행전 5장의 사건은 초대교회를 더욱 사랑하시고 교회를 통해 열방을 변화시키려는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일어났습니다. 외부의 핍박은 교회를 무너뜨릴 수 없었지만 내부의 분열과 죄악은 더 큰 위협이었습니다.
왜 이렇게 엄격하게 다루셨는가 (1-11절)
헌금 시간에 죽을 사람이 얼마나 많겠느냐는 두려움이 들 수 있고, 저도 어릴 적 헌금을 쓰고 과자를 사 먹은 기억 때문에 이 본문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하나님은 새 역사를 시작하시고 거룩한 공동체를 세우실 때 엄격하게 다루셨습니다. 모세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는 다른 불로 분향하다 죽었고, 다윗 시대에 웃사는 법궤를 붙잡다 죽었습니다. 법궤는 제사장이 어깨에 메야 하는데 율법이 오래 무시되었기에 경각심을 주신 것입니다. 인큐베이터의 아기처럼 오순절에 성령으로 태어난 공동체를 철저히 보호하시려는 사랑이었습니다.
책망의 초점은 거짓과 비교의식 (1-4절)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재산을 팔아 일부만 바치고도 전부라고 속였습니다. 베드로는 전부를 바치지 않았다고 책망한 것이 아닙니다. 초대교회는 공산주의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드리는 공동체였고, 일부만 드렸다고 밝혔어도 하나님께 영광이 되었을 것입니다. 문제는 바나바가 헌신으로 인정받는 모습을 보고 뒤처지지 않으려는 비교의식과 경쟁의식에서 시작해 거짓말까지 더한 위선이었습니다. 사도행전 4장 끝의 바나바 이야기에 이 사건을 붙이면 두 사람의 대조가 분명해지며, 이것이 누가의 의도입니다.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서는 신앙
삽비라는 남편이 죽은 일을 모르고 왔고, 베드로는 앞일을 말하지 않고 같은 질문을 던져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삽비라도 같은 거짓을 말해 남편의 길을 갔습니다. 이 부부가 깨닫지 못한 것은 하나님이 행위보다 그 이면의 동기와 마음과 생각을 보신다는 사실입니다. 신앙은 사람에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보이는 것입니다. 시편 139편 1-3절은 하나님이 내 앉고 서는 것과 길 다니는 것, 눕는 것, 모든 일을 샅샅이 아신다고 말합니다.
충격을 통해 주신 세 가지 교훈 (11절)
첫째, 교회가 하나님을 더욱 두려워하고 사단의 역사에 경각심을 갖게 하셨습니다. 사단은 성도보다 먼저 예배당에 와서 예배를 망가뜨리려 일합니다. 둘째, 교회는 거짓 없는 진리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디모데전서 3장 15절은 교회를 진리의 기둥과 터라 하고, 베드로전서 1장 22절은 진리에 순종하여 거짓 없이 사랑하라고 합니다. 셋째, 이것은 그들에게 베푸신 다른 형태의 은혜였습니다. 더 오래 살았다면 유다처럼 사단의 통로가 되어 더 큰 죄를 지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지옥에 갔다고 단정해서도 안 됩니다. 사단이 하나님과 자신을 비교하다 사단이 되었듯, 비교의식의 중심에는 하나님처럼 되려는 죄가 있습니다.
삶에 적용하기
- 누구와도 비교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의식하며 삽시다.
- 헌신할 때 사람의 시선과 인정이 아니라 자원하는 마음과 기쁨,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드리는지 돌아봅시다.
- 신앙생활 속에서도 거짓으로 자신을 포장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온전히 섭시다.
- 사단이 예배와 공동체를 무너뜨리려 일함을 기억하고 경각심을 가집시다.
- 어떤 일이 있어도 그것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건임을 믿고 감사하며 나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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