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와 말씀
[예배영상] 탈육신 시대의 성육신적 교회 (눅 5:33~39)
코로나 이후 비대면 시대에도 교회의 본질은 신랑이신 그리스도와 연합한 기쁨, 세상 속으로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임재, 성령의 교통하심에 있으며, 이 본질을 붙잡을 때 교회는 외부 환경에 무너지지 않고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된다는 메시지입니다.
탈육신 시대에 교회는 몸과 삶이 분리되지 않아야 합니다
코로나 이후 사회는 비대면 언택트를 중심 원리로 삼아 가고 있으며, 이 흐름은 코로나 이전부터 있었고 바이러스로 가속화되었습니다. 짐 캐리가 기계로만 소통하고 신체 접촉이 불법이 되는 시대를 말했다는 예를 들었습니다. 마이클 프로스트는 이러한 현상을 탈육신 시대라 불렀으며, 성육신의 반대 개념으로 육체와 영혼, 상상과 현실이 점점 분리되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 분리가 교회 안으로 들어오면 신앙과 삶, 머리로 아는 것과 일상이 따로 노는 이원론과 위선이 나타납니다. 우리는 이 분리를 경계해야 합니다.
형식으로 자랑하는 금식은 영혼을 높이지 못합니다 (마태복음 6장 없음)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자신들의 해석으로 규칙을 만들어 지키지 않는 사람을 죄인으로 여겼고, 세리와 죄인들과 교제하신 예수님을 정죄했습니다. 예수님은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고 병든 사람에게 의사가 필요하다고 답하셨습니다. 금식의 본래 목적은 영혼을 낮추는 것이지만, 바리새인들은 일주일에 두 번씩 공개적으로 금식하며 육체를 자랑하고 교만해졌습니다. 영혼을 위해 만든 제도가 육체를 위해 쓰이고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것을 벗고 변화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교회는 장소가 아니라 사람이며, 신랑이신 그리스도와 연합한 기쁨이 본질입니다 (34-35절)
예수님은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 금식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며,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임하신 신랑으로 설명하셨습니다. 왕과 백성, 목자와 양의 비유는 연합을 충분히 보여 주지 못하지만 신랑과 신부는 연합됩니다. 유대의 혼례에서 신부가 신랑을 기다린 것은 다시 오실 신랑을 기다리는 그리스도의 신부된 성도의 모습을 비유합니다. 신랑을 만난 기쁨 속의 금식은 슬픔의 금식이 아니라 기쁨의 금식입니다. 신랑을 만난 기쁨과 그분과의 연합이 교회의 생명력이며 능력입니다.
헌 옷을 고치지 말고 세상 속에서 교회로 존재해야 합니다 (36절)
낡은 옷에 새 옷을 기워 붙이지 않듯이, 바리새인들의 율법주의 전통은 헌 옷이었고 예수님의 복음은 새 옷이었습니다. 종교개혁 이후 세상과 구별하는 옷과 제도가 늘어난 것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교회를 여러 영역 중 하나로 두지 않고 모든 영역에서 성도가 교회로 살아갈 때 복음의 옷을 입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5장의 예루살렘 공의회처럼 옛 옷을 벗는 결단이 필요하며, 복음의 옷을 입은 교회만이 시대 속에서 영향을 끼칩니다. 선교지의 선교사와 그곳의 어려운 이웃을 돕는 것도 이 복음의 옷을 입은 모습입니다.
성령의 교통하심 안에서 함께 모여 움직여야 합니다 (37-39절)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하며, 예수님의 강조점은 새로운 시대를 여는 새 포도주, 곧 성령의 임재에 있습니다. 성령의 교통하심은 공동체를 전제로 하며, 함께 예배하고 교제하고 말씀을 나누고 기도할 때 특별히 임하십니다. 교회는 외부의 폭풍으로 무너지지 않고 내부가 기관화되고 운동력을 잃을 때 무너집니다. 바람처럼 움직이시는 성령과 함께 돛을 올리고 움직이는 사람이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삶에 적용하기
- 신랑이신 그리스도와 연합한 기쁨을 날마다 회복합시다.
- 삶과 신앙이 나뉘지 않도록 일상에서 복음으로 살아갑시다.
- 육체를 드러내기 위한 신앙의 형식과 자랑을 내려놓고 영혼을 낮추는 신앙을 돌아봅시다.
- 모이지 못하는 시간에도 교회로 살아가며 성령의 교통하심을 사모합시다.
- 어려운 이웃과 선교지를 마음에 품고 섬기는 통로가 되기를 힘씁시다.
요약은 설교 자막을 바탕으로 자동으로 만든 것이라 실제 설교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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