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와 말씀
아름다운 옷을 입히시는 하나님 (슥3:1-10)
하나님은 죄로 더러워진 우리를 무조건적인 선택으로 붙드시고, 십자가의 은혜로 더러운 옷을 벗기고 아름다운 의의 옷을 입히셔서 새로운 시작을 주신다.
회복의 약속 앞에서 의심이 솟아나는 이유
스가랴가 본 환상은 회복과 격려의 약속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에는 아멘이 아니라 의심이 솟아날 때가 많습니다.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지금 죄 가운데 하나님과 떨어져 살기 때문이고, 둘째는 과거 죄의 기억과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회복은 외형의 회복이 아니라 영혼과 심령, 거룩한 양심의 회복이어야 합니다.
사탄의 고소 앞에 선 대제사장 여호수아 (1-3절)
스가랴의 네 번째 환상에는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여호와의 천사 앞에 서 있고, 사탄이 그의 오른쪽에서 그를 고소합니다. 이것은 재판의 모습입니다.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서 있었다는 것은 율법상 있을 수 없는 일이며, 대제사장의 직분은 백성 전체를 대표하므로 이는 이스라엘 민족 전체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사탄의 고소는 근거가 율법이었지만, 그 동기는 저주하고 무너뜨리며 새로운 시작을 막는 데 있습니다. 근거보다 동기가 중요합니다.
선택에 근거한 하나님의 판결 (2절)
하나님은 여호수아의 죄를 부인하지 않으시면서도 도리어 사탄을 꾸짖으십니다. 첫째, 예루살렘을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선택은 백성이 흠이 없어서가 아니라 무조건적인 은혜에 따른 것이므로, 죄와 허물이 그 선택을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둘째, 그들은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토막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심판 가운데서도 백성을 소멸시키지 않고 건져내어 목적을 이루십니다. 셋째, 하나님은 선택한 백성을 정결하게 회복시키십니다.
더러운 옷을 벗기고 아름다운 옷을 입히시는 은혜 (4-5절)
하나님은 사탄의 고소 근거가 된 문제를 친히 해결하십니다. 천사에게 더러운 옷을 벗기라 명하시고 '내가 네 죄를 없앴다'고 선언하십니다. 이것은 죄를 덮는 것이 아니라 문제의 근원을 해결하는 십자가의 은혜입니다. 이사야 64장 6절은 인간의 의로운 행동조차 더러운 옷과 같다고 말합니다. 갓난아이가 스스로 옷을 갈아입을 수 없듯, 우리도 외부에서 옷을 입혀 주셔야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습니다. 가죽옷과 어린 양의 피가 이를 보여 줍니다.
장차 오실 메시아, 순과 종과 돌 (8-10절)
여호수아와 그 동료들은 장차 오실 메시아의 예표입니다. 하나님은 메시아를 세 이름으로 소개하십니다. 첫째는 '순'으로, 작고 연약하지만 하나님 나라를 이루시는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둘째는 '종'으로, 죽기까지 순종하신 종이십니다. 이 옷은 그분의 희생으로 얻어진 값진 옷이므로 사탄의 고소도 막아냅니다. 셋째는 '돌'로, 일곱 눈이 있는 돌에 하루 만에 이 땅의 죄를 없앤다는 글이 새겨집니다. 이는 십자가의 예언이며, 이 돌에 새겨진 것은 취소되지 않습니다.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에게 약속된 풍성한 삶 (10절)
그날에는 이웃을 서로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로 초대하게 됩니다. 이는 물질적 풍요를 넘어 마음의 풍요와 평화, 하나님 나라의 의와 평강과 기쁨을 뜻합니다. 우리는 내가 벗고 내가 입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벗기고 입히신 의의 옷을 입고 십자가 앞에서 함께 만납니다. 십자가 안에는 언제나 새로운 시작이 있습니다.
삶에 적용하기
- 하나님의 선택은 우리의 죄보다 앞선 은혜임을 기억하며, 죄책감에 머물지 말고 하나님 앞에 나아갑시다.
- 사탄의 고소 앞에 무너지지 말고, 하나님의 선택과 십자가의 은혜로 새로운 시작을 붙잡읍시다.
- 우리가 행한 선한 일도 스스로의 의가 아님을 돌아보고, 십자가가 입혀 주신 의의 옷을 의지합시다.
- 교회의 허물을 지적할 때에도 정죄가 아니라 회복시키려는 동기를 가집시다.
- 순모임에서 서로를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로 초대하는 풍성한 공동체를 세워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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