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와 말씀
[예배영상] 겸손한 왕, 언약을 이루시다 (막 11:1~11)
예수님은 스가랴의 예언대로 겸손한 왕으로 새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군중은 정치적 구원을 외쳤지만, 우리는 죄로부터의 구원을 구하며 십자가의 왕을 맞이해야 합니다.
갈릴리에서 예루살렘 마지막 일주일로
종려주일은 예수님이 십자가로 나아가며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주간을 기념합니다. 공생애 대부분은 갈릴리에서 보내셨지만 복음서는 예루살렘에서의 일주일에 초점을 둡니다. 공생애의 모든 목적이 십자가의 죽음에 있음을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기적을 행하신 뒤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당부하셨고, 왕으로 세우려는 무리를 피해 떠나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입성에서는 나귀를 타고 스스로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주께서 필요하시니 쓰겠습니다 (1-3절)
예수님은 벳바게와 베다니에서 두 제자를 보내 아무도 탄 적 없는 새끼 나귀를 끌고 오게 하셨습니다. 두 마을은 예루살렘에 아주 가까운 위성마을로, 명절에 몰려든 사람들이 머무는 곳이었습니다. 주인이 묻거든 주께서 필요하시니 쓰고 제자리에 갖다 놓겠다고 하라 하셨습니다. 모든 것의 주인이신 분이 남의 소유를 쓰며 보이신 이 태도가 귀합니다. 예수님은 빌린 집, 빌린 배, 빌린 다락방, 빌린 무덤, 그리고 빌린 나귀로 사셨습니다.
스스로 이루신 새끼 나귀의 예언
나귀를 타신 것은 스가랴 9장 9절의 예언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에 관한 예언은 직접적인 것만 200여 가지가 넘고, 베들레헴 탄생이나 부자의 묘실에 안치되심은 하나님의 섭리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새끼 나귀를 타는 일은 예수님이 스스로 선택하셔야 이루어집니다. 탄생 때 누우신 구유도 말구유가 아니라 나귀의 구유였습니다. 나귀는 그분이 무력과 정치력과 물질로 다스리지 않는 겸손한 왕이심을 보여줍니다.
오해가 섞인 호산나 (8-10절)
군중은 길에 겉옷과 나뭇가지를 깔고 호산나를 외쳤습니다. 호산나는 지금 구원하소서라는 뜻인데, 그들은 시편 118편 25절을 로마로부터의 정치적 구원으로 해석해 왔습니다. 종려나무 가지는 시리아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를 무찌른 마카비우스를 환영하던 데서 유래한 민족주의의 상징입니다. 군중은 예수님을 제2의 마카비우스로 맞았지만, 예수님은 오해를 풀려 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가셨습니다. 새끼 나귀는 민족적 메시아가 아니라는 사실을 바로잡는 표지이기도 했습니다.
전차와 말을 없애고 평화를 세우시는 왕
스가랴 9장 10절은 이 왕이 전차와 말과 전쟁용 활을 없애고 바다에서 바다까지 다스린다고 말합니다. 세상의 왕은 무기로 일시적 평화를 지키지만, 예수님은 유월절 어린 양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죄를 사하시고 부활의 생명으로 평화를 주십니다. 복음이 전해질 때마다 민족주의에 신앙이 함몰되곤 했으나, 한국 기독교는 독립운동에 희생하면서도 민족주의에 신앙을 빼앗기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한 민족만 지키는 수호신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왕을 참된 호산나로 맞이하라
예수님은 입성으로 자신을 노출하면 음모의 표적이 될 줄 아시면서도 두려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날은 유월절 14일의 닷새 전인 10일로, 율법에서 유월절 양을 정하는 날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날부터 유월절 어린 양으로 자신을 온전히 드리는 여정을 시작하셨습니다. 우리도 호산나를 외치되, 정치적 대적이 아니라 우리 죄로부터 구원해 달라고 외쳐야 합니다. 옷과 가지 대신 염려와 근심과 죄와 허물을 주님 발 앞에 내어드리고, 모든 죄를 이기신 왕을 환영해야 합니다.
삶에 적용하기
- 고난주간에 주님의 고난이 우리를 참되게 구원하신다는 고백으로 호산나를 외칩시다
- 우리의 염려와 근심과 죄와 허물을 예수님의 발 앞에 내어드립시다
- 무력이 아니라 겸손과 섬김과 희생으로 다스리시는 왕을 따릅시다
- 민족주의에 신앙을 빼앗기지 말고 온 인류의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믿는 신앙을 지킵시다
요약은 설교 자막을 바탕으로 자동으로 만든 것이라 실제 설교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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