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와 말씀
ETHOS 4: 언어 (약 3:1~13)
말은 사람을 죽이기도 살리기도 하는 힘이 있습니다. 말을 관리하려 애쓰기보다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채워, 생명을 선포하는 입술이 되어야 합니다.
복음을 왜곡하는 말을 경계하십시오 (1-2절)
야고보는 세상이 아니라 교회 안의 형제들에게 언어의 문제를 이야기합니다. 매체가 없던 당시에는 아고라 광장에서 자기 지혜를 뽐내는 일이 유행이었고, 그것이 교회 안까지 들어와 복음을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복음은 시대와 상황, 말하는 사람의 지위를 막론하고 처음 전해 받은 원형 그대로 전해져야 합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끌려고 날조하고 선정적으로 바꾸는 일은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선생이 되려 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선생은 자기가 내뱉은 말에 대해 하나님께 더 큰 심판을 받기 때문입니다.
말을 줄이되 말씀을 뱉으십시오
우리는 모두 실수하며, 말의 실수를 없앨 수는 없지만 줄일 수는 있습니다. 빌 하이벨스 목사님의 책에 따르면 사람은 말할 때 3% 정도 실수하는데, 하루에 남자는 2만 단어, 여자는 3만 단어를 말한다고 하니 각각 600단어, 900단어를 실수하는 셈입니다. 말을 줄이면 실수도 줄어듭니다. 그러나 벙어리처럼 살라는 뜻은 아닙니다. 선지자들의 입술에 하나님이 말씀을 주셨듯, 말씀을 주실 때 침묵하는 것은 죄입니다. 성령님이 입술을 주장하셔서 말할 때와 하지 않을 때를 알게 하시고, 말씀을 뱉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그 말이 그 사람에게 적절합니까
꼰대는 자기 생각만 맞다며 모두에게 강요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코로나 때 백신을 맞지 않았는데 많은 불편한 시선을 받았습니다. 건강 문제로 맞을 수 없는 사람도 있었는데 맞아야 한다는 말만 되풀이되었습니다. 그 말이 틀리지는 않았지만 모든 사람에게 적절하지는 않았습니다. 요한복음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두고 예수님은 모세의 율법대로 돌로 치라 하셔도 죄가 없으셨지만,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셨습니다. 그 지혜롭고 적절한 한마디가 여인의 인생을 살렸습니다. 잠언 18:21은 죽고 사는 것이 혀의 능력에 달렸다고 합니다.
작은 혀가 인생을 불사릅니다 (3-8절)
야고보는 말의 재갈, 배의 키, 작은 불씨 세 가지 비유로 작은 것이 전체를 통제한다고 합니다. 울진 산불은 관광객이 버린 담배꽁초 하나에서 시작되어 거의 한 달이 걸려서야 꺼졌습니다. 말도 그렇게 인생을 태웁니다. 탈옥수 신창원 씨는 책 『자유』에서, 육성회비를 못 가져왔다고 선생님이 막말을 했을 때 마음속에 악마가 태어났다고 씁니다. 말이 씨가 되어 열매를 맺은 것입니다. 사람은 동물도 사물도 길들이지만 혀는 길들일 수 없고, 독이 가득해 듣는 사람과 말의 대상과 말하는 나를 죽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말을 듣기만 하지 않고 세고 계십니다.
말 관리가 아니라 마음 관리입니다 (9-12절)
한 입에서 찬양과 저주가 나오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샘이 단물과 짠물을 함께 낼 수 없고, 무화과나무가 올리브 열매를 맺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5:17-18에서 예수님은 입에서 나오는 것은 마음에서 나오며 그것이 사람을 불결하게 한다고 하십니다. 비트겐슈타인의 말을 인용한 글처럼 안과 밖은 같아서, 마음을 숨겨도 표정과 말과 태도로 드러납니다.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이 채워져야 사랑의 언어가, 감사가 채워져야 감사의 언어가 나옵니다. 말을 길들이려 아등바등하기보다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과 에토스를 채울 때 생명이 선포됩니다.
삶에 적용하기
- 내 언어 습관이 어떤지 가족과 지인에게 물어보며 돌아봅시다.
- 과도한 말을 줄이고, 말할 때와 하지 않을 때를 성령님께 구합시다.
- 말하기 전에 이 말이 이 사람에게 적절한지 돌아봅시다.
- 죽겠다, 이혼하자 같은 말을 함부로 내뱉지 말고 축복과 감사의 말을 합시다.
-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과 사랑을 채워 말씀을 선포하는 입술이 됩시다.
요약은 설교 자막을 바탕으로 자동으로 만든 것이라 실제 설교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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